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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준카] 연가

사보이 2014. 10. 29. 02:32




(기형도 - 죽여줘. 죽여줘. 모두가 무서워. 내 육체적 고통보다 내 자신과의 외로움이 더 무서워.)
조직물주의. 카준세준카주의. 뻘내용주의.



        





ver 1.


보스 종인. 서른. 삼영해운 사장. 인천항에서 마약을 밀수. 시내에서 떨어진 산자락 그 어디쯤 넓은 대지에 큰 저택이 있는데 그곳이 보스가 사는 곳. 보스, 준과 더불어 항시 대기하는 조직원 10명이 본채에 산다. 본채에서도 가장 중앙에 있는 공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물'이라고 불리는데 집 안의 또다른 집처럼 몇 개의 방과 거실, 서재 등을 갖춘 독립된 공간이다. 오직 종인과 준면만이 드나들 수 있다. 준면의 침실도 거기에 있다. 그 옆 별채에는 30명 정도의 인원이 수시로 들락거린다.  


그의 정부는 준. 마네킹. 인형.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앳된 얼굴과 하얀 피부. 무표정하지만 어딘가 찌푸린 듯한 얼굴. 보스의 옛 애인이라던가, 이복형제라던가, 무성한 소문의 껍데기로 감싸여 있다. 항상 흰 옷만 입고 다니는 건 보스의 명령 때문이라는 소리도 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목소리를 들어 본 조직원이 손에 꼽을 정도. 확실히, 보스가 없는 곳에서는 입을 본드로 붙여 버린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보스가 없는 곳에서 준은... 노리개에 가깝다. 아무도 몸을 건들지는 못하지만 준을 꿰뚫는 시선들은 이미 몇백 번 그를 훼손하고 망가뜨렸다.


나(세훈)는 칼을 주로 쓰는 청부살인업자. 서른. 나름 커리어가 있는 프리랜서지만 삼영에 매여 있다. 처음 만났을 땐 둘 다 열 다섯살 짜리 덜 큰 소년들이었다. 제 친아버지에게 아버지라 호칭하는 나에게 어린 종인이 약간의 적대감을 가지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오년 정도 함께 사는 동안 둘은 섞일 듯 섞이지 않았다. 종인 아버지의 눈에 띄어 칼잡이로 키워졌지만 조직생활과는 거리가 먼 천성을 충분히 이해한 전대 보스가 스무 살이 되자 특별히 나를 독립시켰던 것이다. 보스의 저택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산다. 한 동만 우두커니 떨어져 나온 낡은 아파트는 재건축에 묶였다. 10층짜리 복도식 아파트를 층층이 채우는 80여 가구 중 79가구는 비어 있다. 이젠 곰팡이와 먼지가 사붓이 내려앉은 그 공간들은 가끔은 내가 처리한 시체가 잠시 뉘어져 있기도 하다. 특별히 돈을 쫓지도 않았지만 조직에는 절대 해가 되는 일은 맡지 않았기에 전대 보스의 신뢰는 절로 따라 왔다. 스무 살에 독립해 5년 만에 종인의 아버지가 죽고 종인이 보스의 자리에 올랐다. 거기서 다시 오 년만에 부름을 받았다. 날 까맣게 잊을 수도 없었고 아버지의 신임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종인은 다시 나를 조직에 다시 묶게 된다.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하는 짓은 거기서 거기일 테니. 종인의 부름을 받을 때마다 낡은 포드를 타고 저택으로 향한다. 아직도 그런 거 타고 다니냐는 핀잔을 받지만 그 역시 아무래도 상관없다.


저택에서 준과 처음 만나고 그와 종인의 관계를 알았을 때 조금 놀라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타고난 무심한 성미 때문이기도 하다.


첫만남: 종인이 보스가 된 후 처음으로 저택에 불려가 독대함. 독대 끝나고 '우물' 속 종인의 서재에서 나오면서 한 남자를 마주침. 준면 입장에서는 가정부나 종인 이외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적이 없기 때문에 매우 놀란다. 나는 어릴 적부터 '우물'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눈앞의 남자가 저렇게 놀라는 것이 이상하다. 아무튼 말 한 마디 없이 서로를 그저 스치듯 훑으며 지나쳤던 게 끝. 그러나 지독하게 짙은 첫인상이 서로에게 남아 있다. 나는 찬열에게 그가 누구인지 듣게 된다. 찬열은 저택에서 (가정부 빼고) 유일하게 세훈을 알고 있는 인물. 종인, 세훈보다 나이가 많다. 세훈이 저택에서 독립해 나가기 직전 조직에 들어와 특유의 친화력으로 친해졌다. 십년 만에 만났어도 어색하지가 않다. 그러나 어릴 때보다는 조금 더 진중해지고 과묵해진, 그러면서도 사람이 어두워진 느낌이다. 조직생활을 하다가 칼을 잡던 손을 다쳐 더 이상 칼을 못 쓰게 되었고, 그럼에도 내치지 않은 종인은 대신 준면을 맡겼다. 이제는 종인 대신 준면을 감시하며 수행비서처럼 준면이 가는 곳마다 같이 간다.


준면은 후에 가정부에게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듣게 된다.


종인은 나를 자주 찾게 되고, 나는 일이 많아지면서 저택에 오가는 날이 많아진다. 아파트의 피비린내도 짙어진다. 곧 큰 건의 마약거래를 준비하고 있는 종인이다.


종인이 바빠진 사이 준면은 자유롭게 나다닐 틈이 생긴다. 물론 준면을 항상 돌보며 감시하듯 따라다니는 찬열이 눈감아준 덕분이기도 하다. 그 동안 내가 저택에서 얼마만큼 떨어진 어느 아파트에 사는지도 유심히 지켜본 준면. '우물'에도 맘대로 드나들고 종인에게 이상한 영향력을 지닌 듯한 나를 관찰한다. 왜냐면, 내가 저택에 왔다간 날이면 어김없이 제 방에를 찾아와 평소보다 지독한 관계를 맺는 종인에게서 평소와는 다른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평소 관계를 가질 때 저를 향한 증오와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나약한 감정을 읽은 준면이었다면, 나를 만난 날의 종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울함에 빠져 악독해지는 것이다. 점점 준면은 '내'가 궁금해지고 '나'를 믿게 된다.


종인을 휘두를 수 있는,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타난 거라고. 그렇게 '나'를 의식하게 되면서, 준면은 오랫동안 경멸 속으로 죽여왔던 증오를 꺼낸다. 종인을 죽여줄 수 있는 사람은 나라고 믿으면서. 구원해달라는 시선을 보내고, 닿아온다. 묘한 눈빛을 읽은 건 세훈이지만, 준면의 그 변화를 종인이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역시 없다.





종인이 나를 부른 건 두어 달 쯤 전의 일이다.


1.


십년 정도나 됐나. 나는 그 저택의 내부구조를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차를 타고 삼십 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쪽에서 날 찾는 일도 없었거니와 굳이 발을 놀릴 일도 없었다. 종인의 아버지가 살아있던 오년 동안은 삼영에서 맡겨오는 일이 꽤 많았다. 그땐 삼영에서 막 나온 나를 다른 곳에서 터치해 오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저택으로 부르진 않았다. 제 발로 나간 나를 존중했기 때문일까. 아버지가 내 아파트까지 직접 움직이는 일은 이례적이었고 그 때문에 종인이 나를 더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많지 않은 나이로 타계한 후의 오년은 정말 거의 한량처럼 보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삼영의 부름은, 아니, 종인의 부름은 끊겼다. 끊겼다는 말도 옳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날 부른 적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날 필요로 했을 뿐이지. 그 동안은 딱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일을 했다. 한 달에 서너번씩만 쓰레기장에 시체를 갖다 부으면 될 정도로. 그러니까, 죽어나갈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얘기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낡은 자동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저택 앞에 멈춰섰다. 저택의 거대한 철문은 틈 하나 내보이지 않은 채로 굳게 닫혀 있다. 목을 조이는 넥타이에 눈을 찌푸리며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응답은 없었으나 문은 기다렸다는 듯 열렸다. 발을 옮긴다. 삼영의 보스가 사는 곳.


한 때 내 방이 있었던 그 저택으로 다시.


2.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희끗해진 머리를 곱게 빗어넘긴 가정부는 나를 기억하지 못 하는 건지 아니면 모른 척 하고 싶었던 건지 그저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가식적인 태도였다. 익숙한 문 앞으로 나를 데려가 허리를 접어 보이면서도 끝까지 마주치지 않는 눈동자는 밑으로 구를 뿐이었다. 나는 여자를 잠시 쳐다보다가 육중한 문고리를 돌렸다. 오랜 세월에도 끄덕없을 것 같던 문은 예전보다 조금 더 크게 삐걱거리며 천천히 열렸다. 서재 특유의 냄새가 훅 끼쳐왔다. 문고리만큼 육중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발을 들여놓았다. 핏빛의 마호가니 원목. 똑같다. 하기사 지난 시간은 십 년 뿐이었다.


그리고 안 어울리게 장서로 가득한 서재 한 가운데 그가 앉아 있었다. 아니. 분명 아버지가 이 곳에 앉아 계실 때는 이 장엄하고 지적이기까지 한 공간에서 위화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십 년 만에 다시 맡은 공기는 어쩐지 불편하고 불쾌했다. 단지 주인이 바뀌어서일까. 모르겠다.


아무래도 한창 예민할 때 만나 함께 치부를 보이며 성장했던 기억 때문인지 나는 종인에게 허리가 잘 굽혀지지 않았다. 종인도 그런 모양이었다. 책상 건너에 삐딱하니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섰다. 아버지가 앉았었던 그 의자에 기대 앉아 나를 훑으며, 그는 분명 약간 당황스러운 눈동자였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서로를 향한 시선엔 감정도, 그 어떤 것도 섞여 있지 않았다. 순수하고 의도적인 관찰이었다. 그리고 그가 반쯤 누워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프링이 튕기는 소리가 났다. 큰 보폭으로 다가오는 호리호리하고 다부진 몸이 내 앞에 섰을 때 나는 그저 눈을 깜박였다. 코 밑에 깔린 공기가 갑갑했다. 말이 없었다. 또다시 건조한 시선을 지루할 정도로 한참 주고받고 나서, 이윽고 종인이 손을 내밀었을 때.


“잘 살았냐 오세훈이.”

“덕분에요.”


그제야 나는 나이프 자루를 비스듬히 쥐고 있던 바지 주머니 속의 손에서 힘을 뺐다.


“허어어. 우리가 어떤 사인데 요 자 붙이고 난리야. 이렇게 반가워 죽겠구만. 어?”


하나도 안 반가운 얼굴로 그런다. 맞잡고 세게 흔드는 손은 그렇게 크지 않음에도 단단하다. 5초도 안 되어 떨어졌지만 그 사이에 종인은 내 손바닥에 굳은살이 어디 어떻게 박혔는지 파악했을 터였다. 아버지가 하나부터 열까지 나를 손수 가르치며 칼잡이로 길러냈다면 종인은 아버지 없이도 그런 인간으로 자라날 남자였다. 그 동물적인 감각은 태생부터가 달랐다. 난 그걸 지켜봐 온 사람 중 하나였다. 말없이 시선을 쏟는 내게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이는 입술이 반들거린다.


“아. 이제 내가 보스라서?”

“.....”

“어?”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종인이 바라는 건 분명 이것이었을 테다. 그 끈질긴 얼굴에 대고 나는 침을 뱉듯이 말을 뱉었다.


“...예.”

“......”

“보스.”


히야. 그는 개를 길들이는 사람의 얼굴로 과장된 감탄사를 뱉어낸다. 응당 들어야 할 말을 들었다는 당연한 표정마저 곁들인 채. 그 오만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다. 그는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종인은 나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왜? 신뢰 문제야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가 나 같은 걸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어감 죽이네. 네 입에서 나오니까.”


어차피 내 대답을 듣자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종인은 아무 말이 없는 나를 보다가 벌건 혀를 내어 입술을 슥 축였다. 그 눈, 여전하구나. 그가 턱짓을 하며 덧붙였다. 핏빛보다 짙은 나뭇바닥에 서서 나는 십오 년 전 우리를 떠올렸다. 열다섯의 우리가. 아니. 종인과 내가 처음으로 조우했던 바로 이 곳. 아버지의 손이 얹힌 내 어깨를 노려보며 종인은 그랬었다. '저 새끼 눈이 사람 같지가 않아요, 아버지.'


“좋긴 한데. 존댓말은 집어치워 줬으면 좋겠다. 세훈아. 그래도 하청보다는 동업자급이라고 생각한단 얘기야. 옛정이 있잖냐.”


빙글빙글 웃는 얼굴은 그 시선만큼 선득한 냉기가 흘렀다. 오 년 만에 다시 삼영에 발이 묶이게 생겼으나 딱히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사람 죽이는 거야 거기서 거기고, 어디 발을 담구느냐는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다만 종인. 보스의 저의.


그 후에 이어진 그의 신변잡기식 농담은 저급했다. 나는 한 마디도 제대로 대꾸하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대던 짧은 나이프가 체온으로 찝찝하게 데워져갈 무렵, 종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완전한 침묵이었다. 나는 여전히 주머니에서 한쪽 손을 빼지 않고 있었다. 까맣고 나른한 눈동자가 주머니 속을 꿰뚫어보듯 스쳐갔다.


“간다.”

“어. 또 보자.”


무거운 문을 밀어 나갈 때까지 종인의 따가운 시선은 등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를 만났다.


3.


아파트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소각장이 딸린 거대한 쓰레기장을 등지고 있었다. 그 담을 경계로 아파트는 지대가 꽤 높았다. 10층짜리 건물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쓰레기장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공동묘지 같았다. 실제로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고 봐도 좋았다. 썩지도 않는 그 쓰레기들을 그만큼 쌓아올린 이들은 이미 이 동네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나처럼 빌라 혹은 아파트 한 동에 외로이 살고 있는 몇 가구의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가끔 골목을 걸어내려가는 모습을 보이는 그들은 모두가 담 너머의 인간들이다. 담 안쪽 이 아파트에 나 외의 사람은 살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아침 출근길 혹은 밤늦게 그들이 묵직한 비닐봉투를 들고 소각장 안으로 쓰레기장 안으로 던져 넣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기막힌 냄새가 흘러 들어온다. 그렇게 가끔 쓰레기를 보태는 이들은 그게 쓰레기 냄새인지 시체 썩는 냄새인지 분간하지 못할 것이었다. 방수포에 감싸인 시체를 차로 데리고 와서 그대로 옥상에서 떨어트리면 곧장 쓰레기장으로 들어간다. 시체. 쓰레기. 죽어버린 몸... 다를 게 뭔가. 상당한 높이를 낙하해 둔탁하고 끔찍한 소리를 내며 쓰레기와 섞이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나는 가끔 저기에 그대로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4.


깊은 밤. 검은 슬리브리스만 입고 있던 나. 갑자기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 인터폰 화면에는 의외의 인영이 비치고 굳는 나. 단 한 번 울린 벨. 미동도 없이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보던 나. 결국 화면이 꺼지지만 벨은 다시 울리지 않는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문을 연다.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트린 그가 서 있다. 센서등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복도에 내 등뒤를 타고 쏟아지는 집 안의 형광등빛이 그를 비춘다. 오늘도 하얀 옷. 올이 성긴 하얀 니트에 하얀 바지. 그리고... 맨발.


“준...?”


바짝 말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한참만에 달싹여본다. 어느 한 곳에 맺히지 못하는 그의 시선이 분연히 흐트러졌다. 여긴 무슨 일로. 이어 묻는 대신 그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으레 보여야 할 아이들조차 달고 오지 않은 채로, 그는 온전히 홀로 여기 내 집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어째서. 어떻게.


왜?


핏기 없는 입술을 꾹 깨무는가 싶었다. 갑자기 그가 내 품으로 쏟아져 내렸다. 목을 끌어안는다. 찬바람에 식은 몸은 낭창하고 절박하게 매달려 왔다. 그를 마주 안아내지도 못했다. 허공에 떨어진 두 주먹을 꼭 쥘 뿐이었다.


뚜벅.

뚜벅.


그것은 무언가의 아주 느리고 고요한 심장소리처럼 들렸다. 천천히 여유롭게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라는 걸 알아챘을 땐 이미 누군가 바로 아래층에 와 있었다. 계단은 이제 두 개가 남았다. 품 안에서 죽은 새처럼 매달려 있던 준은 갑자기 몸을 바르르 떨었다. 뚜벅. 한 걸음 그가 계단을 올라설 때마다 이제 준은 내 피부 위로 공포에 절여진 숨을 뱉었다. 나는 여태껏 늘어져 있던 손을 올려 그를 끌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 몸을 맡기는 체온이 싸늘했고, 너무나 간단하게 감겨 오는 허리가 가늘었다. 허무하게도. 그는 너무나 쉽게 내 품으로 들어와 자신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허연 뒷목으로 긴 한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복도의 끝을 감싼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인영은 역시.


보스.

김종인.


입술을 질기게도 비틀어올리는 얼굴이 어둠에 반쯤 절여져 있었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품에 받쳐든 하얀 등을 쓸어내렸다. 목을 껴안아오는 팔이 갑갑했다. 그리고 종인은. 그는 뒤틀린 미소를 지은 채 구두 앞코로 차거운 콘크리트 바닥을 툭툭 쳤다. 좁은 복도에 튕겨 오르는 그 작은 소리의 반향은 마치 전쟁을 알리는 나팔수의 긴 나팔소리처럼 들렸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마디가 굵은 손이 뱀 같은 송곳니를 세우며 천천히 자켓 안주머니를 파고들기 시작한다. 아아. 나는 눈을 질끈 감아내렸다.



ver.2


삼영 늙은 보스 아들이자 실세인 종인. 어릴 적 같이 자란 세훈. 스나이퍼? 킬러? 성인이 된 이후 독립. 오 년만인가 십 년 만에 저택으로 돌아오자 보스는 저택의 방에서 호흡기에 의지한 채 누워 있다. 종인이 조직을 쥐고 있고 보스의 애인인 낯선 남자(준)이 저택에서 살고 있다.


준: 백금발. 무채색의 옷들. 안 그렇게 생겨서 말이 많고 발랄해 보임. “쓰레기 속에서 살려면 쓰레기가 되어야죠.” 그러나 터득한 생존 방식일 뿐. 종인에게 꽤 나긋나긋이 굴어오지만 종인은 항상 준이 맘에 들지 않는다. 그 눈빛.. 그 경멸. 종인을 그딴 식으로 보는 건 딱 둘이다. 준면과 세훈. 세훈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자란 종인. 친아들이 아님에도 아버지의 애정을 더 많이 받았고. 자기보다 뛰어난 재능. 세훈이 떠나고 그 눈빛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애인인 준이 또다시 그런 눈빛으로 저를 본다. 하기사 그 눈빛은 단지 종인에게만 내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앞에서도 웃어 보이는 조직원들 앞에서도 시시각각 변하는 준면의 눈동자. 이 커다랗고 무감한 저택 안에서 그 무색무취의 변화를 감지하는 건 종인 뿐이다. 굳이 숨기려 들지도 않는 경멸은 준의 마지막 자존심인가. 그것까지 짓밟아 온전히 정복하고 싶은 종인. 준면을 괴롭히면 체면불고하고 바짓가랑이를 잡아 매달려 온다.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더 잘할게요.” 울면서 웃는 얼굴로 올려다보는 준면. 모멸감을 안길 수록 숨겨지지 않는 경멸. 그 경멸에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은 건 종인이다. 준면을 씹어먹어버리고 싶은 종인과 그를 구원하고 싶은 세훈.


세훈이 나타나고 준면은 무너져 간다. 결국 매달린다.


“구해 줘요. 어서... 날 좀 빼내 줘요. 차라리 죽여 줘요. 당신 잘 하는거... 그 칼로요. 쑤셔 줘요. 저 쓰레기 더미에 나도 버려 줘요. 시체들이 내 목을 조를 수 있게 해줘요. 구더기가 날 파먹어 치우게. 깨끗이 없어져 버리게. 제발요. 세훈씨. 오빠... 오빠라고 불러 드릴게요. 싫어요? 그이(종인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음)는 그렇게 부르면 좋아해요. 그래서 세훈씨도 그럴 줄 알았어요. 아니라면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묘한 슬픔과 기시감을 참지 못한 세훈이 결국 입을 막으며 키스해온다.




두 가지 버전을 생각하고 있는데 둘 다 묵혀두고만 있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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