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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준] 화양연화

사보이 2015. 5. 27. 02:33
즈그 집 망했다안카나.
맞지예. 돈이고 뭐고 사람 일 모른다 아입니꺼.

세훈은 눈을 떴다. 구름이 한바탕 지나간 하늘에서 쨍한 햇살이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눈부신 시야는 아프고 저릿한 흰 빛 뿐이었지만 세훈은 초점도 없이 그 넓은 빛의 너울을 눈도 감지 않고 노려보았다. 위험한 짓이었다. 그러나 그제서야 머릿속에서 소근거리던 목소리들이 쫓겨났다. 아나, 니 이름 적어라. 등교 첫날 희끗희끗한 머리의 담임 선생님이 툭 던져준 정체 모를 종이에 이름을 적으면서도 세훈은 등 뒤의 공기들을 신경쓰고 있었다. 선생님이라지만 결국엔 시끄러운 남의 입들. 오자마자 정이 떨어지겠다 싶었다. 갑작스런 전학생에 시끄러워진 낯선 또래들과 전학생이 오든 말든 평소처럼 분필을 잡은 선생 앞에서 단번에 고개를 책상에 처박고 아무 의지가 없음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신경 좀 꺼 달라고.

아버지는 이런 데서 썩지 않을 거라며 그 시절 젊은 세대들이 한번쯤 품었을 법한 꿈을 가지고 무작정 상경해 꽤 자수성가한 분이었다.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 방법이라던지. 인간 관계라던지. 뭐 그런 것들이었을까. 아버지도 그 땐 당신 발목을 잡을 일인 줄 모르고 저질렀을 거다. 아니면 너무 물정을 모르고 순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대궐같은 집엔 빨간 딱지가 나붙기 시작하고, 모르는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고, 사립 고등학교엔 소문이 돌고, 어머니는 어느 날 돌아오지 않았고.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 아버지는 결국 아들의 면전에서 빈털터리가 되었음을 인정했다. 아니. 완전히 빈털터리는 아니었다. 돌덩이같은 빚이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유산. 사실 유산이라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세훈은 커튼 쪼가리도 없어 몇 개의 옷걸이에 목을 매 죽은 아버지의 지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현금을 찾아 기차를 탔다. 그 안에서 세훈은 웅크려 앉아 끔찍함에 대해 생각했다. 지갑을 더듬어 빼내는 중 느꼈던 시체의 감촉. 기차는 철길에 꺼멓게 내려앉은 밤 속을 달렸다. 무작정 부산으로 가려다가 손에 쥔 돈이 얼마 되지 않음을 깨닫고 노선표를 유심히 보다가 발견한 지명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 곳은 말로만 듣던 아버지의 고향이었다. 고향이라지만 친척이라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연고 없는 곳에서도, 지난날 상경해 돈 좀 벌었다가 갑작스레 거꾸러진 이야기는 세훈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목사님은 어릴 적 아버지를 알았다 했다. 세훈을 목사관에 딸린 작은 집에서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 얼마 뒤에는 학교도 보내주었다. 누구 좋으라고. 세훈은 차마 이 말은 하지 못하고 묵묵히 낡은 교복을 받아들었다. 공동 창고로 쓰는 마을 회관에 묵혀둔 것이었다. 누가 입던 건지도 모를 교복은 사모님이 아무리 깨끗이 빨고 다려줘도 눅눅한 곰팡이냄새가 미미하게 남았다. 잊혀지지 않는 그런 종류의 냄새였다. 서울 집을 빠져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맡았던, 아버지의 시체에서 나온 오물 냄새 같은.

세훈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픈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세훈은 눈을 감고 옆에 던져둔 자켓을 얼굴에 덮었다. 햇빛에 뜨끈해진 옷자락 때문에 감은 눈꺼풀이 더 뜨거워지는 듯도 싶었다. 사실 신경쓰지 않으면 모를 정도의 냄새였지만, 옷자락에서 나는 지긋지긋한 곰팡이 냄새는 콧속을 후벼팠다. 오히려 눈물이 스며들면서 그 특유의 냄새에 곰팡내가 묻히는 것도 같아 참을 만했다. 그러면서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자그맣게 휙 소리가 나면서 갑자기 햇빛이 덮쳐 왔다. 햇빛은 잠자던 얇은 눈꺼풀 아래에서 색색의 점으로 명멸했다. 휙 소리는 누군가 세훈의 얼굴을 덮고 있던 자켓을 벗기면서 난 소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짚은 채 햇빛을 이고 있는 누군가가 세훈을 내려다봤다. 눈부시게 이지러진 얼굴 틈에서 비틀어지는 입꼬리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목소리.

찾았다.

높낮이가 불분명한 조근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알았다. 서른 명이 될까말까 한 반 애들 중에서 유일하게 사투리를 쓰지 않는 반장. 말을 나눠 본 적은 없었다. 그냥 차렷, 경례, 하는 그 짧은 구식 인사만으로도 타지 사람인 게 티가 났다. 저도 어디서 도망쳐 내려왔는지. 생각은 했지만 말 한 마디 나눠 본 적이 없는데 그런 걸 물어봤을 리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세훈의 아버지같지는 않을 테니까. 세훈은 햇빛을 등진 반장의 그림자 속에서 말없이 눈만 깜박였다. 달걀귀신처럼 햇빛에 잡아먹혔던 반장의 이목구비가 천천히 돌아왔다. 선생님이 너 찾는데, 좀 같이 내려가자. 햇빛이 싫었던 건지 옥상의 달궈진 공기가 싫었던 건지. 아니면 세훈의 교복에서 풍기는 우울한 냄새, 그 이상할 정도로 사소한 냄새를 맡아 버렸던 건지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귀찮았지.

사실은 그랬던 거라고 그애는 나중에서야 말해 주었다. 공부하기 바쁜데 문제아까지 떠맡았잖아. 장난스럽게 던지는 말엔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누렇게 죽은 풀이 깔린 들판에 함께 누워 하늘을 바라다 보는 중이었다. 얇게 뜬 회 무더기처럼 하늘을 꽉 채운 구름떼가 아주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분위기에선 어떤 것도 쉽게 망쳐지지 않았다.

거북이 등껍질 같애.

그애가 하늘을 가리켰다.

새털구름.
오오.

세훈은 뭐가 오오야, 하고 말하면서 고개를 돌려 그애를 쳐다봤다. 정돈된 옆선이 있었다. 오뚝한 코 끝이 말갛게 빛났다. 구름 사이에서 해가 비져나왔다. 주위의 구름에 노르스름한 띠가 번지고 해가 그대로 둘에게 손을 내리뻗었다. 눈이 부셨다. 세훈은 눈을 찌푸렸지만 그애는 온화한 얼굴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앤 햇살을 좋아했다. 잎이 떨어져 버린 나무도 좋아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한 점의 그늘도 없이 청명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사랑했다. 그 말간 얼굴. 보드라운 냄새가 나던 입술. 모든 것을 어루만지던 차갑고 맑은 초겨울의 햇살.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을 수 있다면 주저 없이 그 때를 말하리라. 그러나 모두가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들이었다.


이런 걸 장편으로 쓰고 싶었는데 묵혀두다가 영영 안쓸것 같아서 조각으로라도 풀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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